세상에 공짜는 없다


 90년대 이후 한국 SF 시장의 역사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자유시장경제의 원리에 입각하여 중도에 멈추거나 포기한 SF 시리즈 또는 선집들의 잔해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인 형식, 즉 출판사가 어떤 책을 내고 그 책을 원하는 독자들이 구입하는 식으로는 출판사가 수익을 얻기 어렵다는 사실은 확인된 지 오래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잠시 죽은 자식의 고환을 만지는 일을 그만두고 저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자. 그쪽이 더 보기 좋아서는 아니다. SF 팬덤의 머릿수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이미 지나온 길들이 그러했듯, 눈앞에 펼쳐진 땅들도 거진 황무지로 이루어져 있다.

 취미에다가 어떤 비장함을 부여하기는 어쩌면 어리석은 일이고, 실제로 누구도 이 황무지를 걸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과 좀 더 긴 미래를 함께 하고 싶어 한다. 아마도 당신은 SF를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 질문을 미래로 향해 보자. 시장의 크기가 좀처럼 확장되지 않는 SF의 출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업계는 몇 가지의 자금 조달 실험을 진행 중에 있다. 바로 독자들이 참여하는 실험 말이다. 글의 분량 상 크게 출판사 펀드와 그 외 펀드로 나누어 언급하겠다. 이번 회는 출판사 펀드다.


 출판사 펀드의 대표적인 사례는 언론에도 수차례 언급된 북스피어 출판사다. 북스피어의 경우 펀드 금액을 프로모션에 투자하는데, 이때 프로모션 대상 도서는 미리 정해져 있다. 따라서 북스피어 펀드는 어떤 책을 출간하기 위한 펀드는 아니지만, ‘어떻게든 책이라도 내 보자’라는 방어적인 발상을 넘어 ‘제대로 한 번 띄워볼 테니 자본을 모아보자’는 원기옥스러운 아이디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 펀드에 참여하는 독자들 중에 가시적인 수익을 바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산술적으로 보면 이 펀드는 러닝 개런티 형식을 빌린 일종의 (사실상 금리 제로의) 저리 대출이다. 확률 대비 이율로 따지면 정말로 의미 있는 수준의 이율을 달성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참여하는 사람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펀드에 투자할 때의 담보 또는 기대수익은 무엇일까? 우정과 재미다. ‘우리’가 같이 가자는, 으쌰으쌰 하자는, 비밀기지에서 모의작당을 펼치는 흥겨움이다. 북스피어는 수 년 동안 독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면서 장르 팬덤의 일부를 출판 시스템 안으로 서서히 편입(독자들이 물류작업까지 함께 하는 출판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시켰고, 펀드는 그 ‘시스템화하는 팬덤’의 최종 형태 중 하나로 등장했다. 이 펀드를 통해 독자는 생산과 유통이 완료된 뒤에야 비로소 등장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제작 및 유통 과정에 미리 또는 이미 작용하는 비금융적인 자본-동력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출판사 입장에서는 무척 유리한 자금 운용이며, 독자들(팬들) 입장에서는 재미있는 게임이다. 북스피어는 기존의 업계 상식대로라면 대출 또는 자본 잠식을 일정 확률로 각오해야 할 대규모 프로모션을 ‘눈에는 보이지 않는’ 우정을 담보 삼아 큰 리스크 없이 실현시킬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출판사의 운신의 폭이 넓어지는 모습은 다른 문화 업계를 통틀어서도 좀처럼 볼 수 없는 고무적인 사례다. 장르 팬덤의 머릿수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지만, 북스피어는 이들이 <300>에 나오는 스파르타 정예 용사들과 같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물론 북스피어의 모델을 바로 따라갈 수 있는 출판사는 없다. 오랜 시간 동안 끊임없는 소통을 바탕으로 한 신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북스피어라는 ‘출판사에 대한 팬덤’이 장르 팬덤 일반의 결집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것도 사실이다. 다만 유사한 경우는 있다. 장르 전반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행복한책읽기(이하 행책) 펀드다.

 행책 펀드의 경우는 북스피어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 우선 출판사에 대한 신뢰로 모은 펀드가 아니었다. 현재 행책의 SF 출간은 대단히 저조하다. 기존의 신뢰는 이미 많이 잠식당한 상황이다. 행책 펀드는 그래도 지금까지 SF를 많이 출간해왔다는 출판사 자신의 정체성을 밑천 삼아 ‘앞으로도 어쨌든 출판을 이어가겠다’는 불분명한 공약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애당초 출판사의 존망 여부가 펀드의 목적이라고 볼 정도로 방어적인 펀드였다. 적극적인 부분이 있었다면 급격히 페이스가 떨어진 행책의 SF 출간 싸이클을 좀 더 올리고 싶다는 독자들 각자의 열망뿐이었다. 이 펀드에서 고무적인 점이 있다면 북스피어만큼 강력한 팬덤을 형성하지 않더라도 SF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기대로 모금이 가능했다는 것 정도다. 이는 팬덤 자체의 ‘자본적’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계기였고, 모금 금액으로 보는 측정 결과는 충분히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펀드 자체의 결과다. 작년에 실시된 행책 1차 펀드에서 약속된 공약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2차 펀드 모금이 이루어진 것 자체도 충분히 부정적인 신호지만, 2차 펀드의 공약이 1차보다 더 후퇴했음에도 불구하고(즉 펀드로 할 수 있는 일이 더 줄어들었다) 펀드 환급과 이익 배분의 측면 역시 후퇴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행책 2차 펀드는 공개적으로 SOS를 선언한 1차 펀드에 비해 더욱 생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앞서 말했듯 행책 펀드는 출판사 팬덤이 아니라 SF라는 장르 자체의 팬덤으로 이루어졌다. SF를 내는 ‘행책’이 아니라 ‘SF’를 내는 행책에 주어진 카드였던 것이다. 펀드의 성패는 오로지 SF 신간이 얼마나 나오느냐에 달렸다. 그러나 상황은 지속적으로 나빠지고 있다. 최소한 행책 펀드가 기치로 내건 ‘연 1권 이상의 SF 출간’을 위해 남은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 중이다.

 펀드 자체는 실패할 수도 있고 때로 부실한 펀드가 존재할 수도 있다. 누군가 제안했고 다른 누군가가 기꺼이 응한 ‘신용 거래’에 대해 제삼자로서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고도 볼 수도 있겠다. 따라서 펀드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거나 기간을 짧게 잡아야 한다거나 하는 식의, 프로젝트 펀딩에 대한 일반론적인 이야기는 넘어가겠다. 그러나 대단히 효율적으로 변용할 수 있는 장르소설 팬덤이라는 에너지 자원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행책 펀드가 팬덤에 피로감을 안겨주었다는 것만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유독 높은 자부심 또는 계몽의식(비교적 좋은 뜻이다)과 그에 반비례하는 시장 상황 때문에 SF 팬덤은 이미 피로한 상태다. 인터넷의 대중화 및 인터넷 서점의 활성화와 함께 SF 리뷰가 유독 활발했던 적도 있었고(최근 SF 리뷰 수가 급감한 것 역시 피로가 쌓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팬들이 자발적으로 직지프로젝트 같은 아카이브 작업에도 도전하는 등, SF 팬들은 팬덤의 확장을 위해 가능한 방식을 나름대로 타진해왔다. 그리고 현재 그들에게 남겨진 결과물이라고는 뭘 해도 딱히 뾰족한 수가 없더라는 결론뿐이다. 펀드는 팬들에게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카드패였다. 행책 펀드는 이 카드패에서 꺼내 든 첫 번째 카드였고, 결과는 현재까지는 거의 명백한 실패로 보인다. 이 카드패, 즉 펀드 시스템 자체에 대한 신뢰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뭘 해도 안 되더라는 불가능의 데이터베이스에 목록이 하나 늘어나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장르에 애정을 가진 소중한 동력원들로 하여금 수동적인 소비자의 상태로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이 피로감을 어떡할 것인가? 그렇게 고개를 젓는 사람이 단 한 명일지라도, 그 단 한 명이 그때까지 얼마나 큰 역할을 해 왔는가 말이다. 고정 팬이 천 명이나 이천 명만 있어도 아무 프로젝트도 필요로 하지 않고 굴러갈 수 있는 이 바닥에서 한 명 두 명은 얼마나 큰가?

 행책 2차 펀드가 1차에 비해 적은 액수로 마감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남은 카드가 이미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결국 이는 한 출판사의 문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피로도가 증가하고 있는 팬덤의 건강에 대한 문제다. 따라서 펀드에 임하는 분들은 사명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이자 없는 대출은 없다. 비용은 어디서건 발생한다. 그리고 부실한 문화 펀드가 담보로 삼은 ‘보이지 않는 비용’이란 바로 팬덤의 생명력, 지속성, 즉 미래다. 펀드는 팬들에게 게임처럼 인식되어야 하지만, 결코 게임이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는 이 얼마 남지 않은 장르 펀딩의 가능성이 제대로 만개할 수 있길 바란다.


 다음 회에는 최근 화제가 된 초여명 출판사의 <던전 월드>에서 보는 클라우드 펀딩과 그 확장으로써의 장르 출판 협동 조합의 가능성, 그리고 현재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논의 중인 ‘먼저 독자들이 출간을 신청하고 여론을 모은 다음에 불특정 출판사들이 그걸 보고 가능성을 타진한 뒤 뛰어드는’ 리버스 펀드 같은 무모한(?) 시도 등을 체크할 예정이다. 다음 회까지 모쪼록 건강하시기를, 아니 SF의 종말이 올 때까지 다함께 건강하시기를 두루 기원 드린다.





최원호

어린 시절 금성출판사의 SF로 본격적인 독서를 시작했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MD로 들어가서 유아 그림책부터 각종 수험서까지 다양한 분야의 책을 팔아왔다.

현재는 소설과 예술 분야를 담당하고 있다. on우주 홀수호에서 칼럼 "소매가로 책을 팝니다"를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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