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울고 있었다. 카퍼는 쪼그리고 앉아 소녀와 눈을 맞췄다. 눈물을 닦아낸 소녀가 카퍼를 바라보자, 카퍼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 동전은 허공으로 튕겨졌다가 카퍼의 손바닥 사이에 잡혔다.

카퍼가 말했다.

“앞, 뒤?”

소녀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바라보자 카퍼가 재촉했다.

“맞혀봐. 앞일까, 뒤일까.”

소녀는 목멘 소리로 말했다.

“앞이오.”

카퍼가 동전을 드러냈다. 뒤였다. 숫자 면이 드러나 있었다. 소녀는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고, 카퍼는 다시 동전을 던졌다.

카퍼가 말했다.

“앞, 뒤?”

“앞.”

소녀는 이번에도 틀렸다. 뒤였다. 이어서 카퍼는 한 번 더 동전을 던졌고, 소녀는 또 틀렸다.

눈가가 붉어진 소녀는 카퍼의 손에서 동전을 낚아챘다. 평범한 동전이었다. 소녀는 제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내밀었다. 

“이걸로 해봐요.” 

카퍼는 군말 없이 소녀의 동전을 던졌고, 소녀는 여전히 맞힐 수 없었다.

소녀가 말했다.

“우연이죠?”

“한 번 더 해볼까?”

한 번 더 했다. 결과는 같았다.

“속임수죠?”

카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법이야.”

“마술?”

“마법.”

소녀는 심통이 나서 눈을 치켜떴다. 카퍼는 일어서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녀가 카퍼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한 거예요? 가르쳐줘요.”

“마법은 아무에게나 가르쳐줄 수 없어.”

“그냥 손가락 속임수잖아요.”

“아냐.”

“사기꾼.”

“아냐. 난 마법사다.”

“사기꾼들은 늘 그렇게 말해요.”

“마법사도 이렇게 말해.”

카퍼가 걸어가자 소녀는 그를 쫓아갔다.

“그럼 다른 마법도 보여줘요.”

“나는 동전 마법밖에 못 써.”

“그게 무슨 마법이야. 동전을 뒤집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 말에 카퍼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불을 지피는 마법이나 먼 곳으로 순간이동하는 마법을 보라고. 불을 지피는 건 부싯돌을 쓰면 그만이고 두 다리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잖아? 마법을 준비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걸.”

“그치만 쓸모가 없잖아요. 동전을 뒤집어서 어디다 써요?”

“부침개를 뒤집을 수도 있어.”

“그게 다예요?”

“식당에서 음식에 벌레가 나왔을 때 식탁을 뒤집은 적도 있군.”

“깡패네, 그건.”

“도대체 뭘 바라는 거야? 그래. 길 가던 예쁜 아가씨 치마를 바람결인 양 뒤집을 수도, 젠장.” 

카퍼는 정강이를 부여잡았다. 

“왜 걷어차는 거야?”

소녀가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몰라서 물어요?”

카퍼는 정강이를 한참 문지르다가 일어났다.

그래도 카퍼를 한심하게 내려다봤던 것은 소녀밖에 없었다. 마을은 텅텅 비었고, 광장에는 카퍼와 소녀, 둘뿐이었다.

문득 의아해진 카퍼가 말했다.

“그런데 이 마을은 왜 이렇게 한적하지?”

소녀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여행자라면 그냥 지나가는 게 좋을걸요.”

“왜?”

“이 마을의 영주가 뱀파이어거든요.”

“뱀파이어?”

“이 마을은 동쪽 끝이니까요. 벼랑에서 뱀파이어 하나가 기어 왔다고 해도 이상할 거 없죠. 어느 날부터 옛날 영주님을 죽이고 자기가 영주 행세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 더 묻지 말고 지나가요.”

“아니, 어차피 뱀파이어는 성에 나오지 않잖아? 낮에 도망가면 될 텐데.”

“뱀파이어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왜?”

“뱀파이어가 마을 처녀들을 모두 데려갔거든요. 그 가족들은 꼼짝없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죠.”

“그것도 이상한데. 뱀파이어가 강하기는 해도 마을 사람들 전부와 싸울 순 없을 거 아냐. 뱀파이어 혼자서 마을 처녀들을 모두 데려갈 수는 없었을 텐데.”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하들이 있어요.”

“어떤?”

“라이칸슬로프요. 그런데 안 갈 거예요?”

“수가 많나?”

“일고여덟 정도.”

“혹시 시커먼 놈이 애꾸 아냐?”

“어? 어떻게 알아요?”

“역시.” 

카퍼는 까슬한 턱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아마 내 생각이 맞다면 그 뱀파이어는 세상의 뒷면에서 기어 올라온 뱀파이어가 아냐. 내가 잘 알고 있는 놈이지. 이런 마을에서 영주 노릇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 그런데 뱀파이어가 영주인 것과 마을에 사람들이 없는 건 무슨 상관이지?”

“아, 그건…….”

카퍼는 소녀의 말을 미처 다 듣지 못하고 의식을 잃으며 쓰러졌다. 그 뒤로 몽둥이를 든 마을 청년 하나가 나타났다. 

“잘했다. 루나.” 

소녀는 카퍼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라니까.”




탈출


카퍼는 마구간 구석에서 깨어났다. 손발이 밧줄에 묶여 있었다. 카퍼는 밧줄을 풀기 위해 이로 물어뜯고, 바닥에 비벼댔지만 무리였다. 힘을 다 뺀 카퍼가 짚더미에 쓰러질 쯤에 창고 문이 열렸다. 소녀가 수프가 든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카퍼가 말했다.

“알았다. 뱀파이어는 피를 마셔야하고, 라이칸슬로프는 고기를 먹어야 하니 마을 사람들은 그 괴물들에게 봉사하며 모험가나 여행객을 바치는 건가? 이런 짓이 언제까지 계속될 거라고 생각하지?”

소녀는 대답하지 않고 수프를 떠서 카퍼의 입으로 가져갔다.

카퍼는 먹지 않고 계속 떠들었다.

“소문이란 건 생각보다 쉽게 퍼진다고. 나만 해도 이쪽으로 오는 동안 흉흉한 이야기를 몇 개 들었지. 당분간은 호기심 넘치는 모험가들이 마을에 들르긴 하겠지만 그것도 당분간이야. 곧 마을을 찾는 발길도 뚝 끊기겠지. 그렇지만 뱀파이어와 라이칸슬로프들에겐 계속 피와 고기가 필요할 거야.”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소녀는 들고 있던 그릇과 숟가락을 내팽개쳤다.

“마을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어요! 그렇지만 모두 실패했다고요. 탈출하려 했던 사람들은 모두 시체로 돌아왔고, 칼을 들고 성으로 뛰어 들어간 사람들은 시체도 돌아오지 못했죠. 방법이 없단 말이에요.”

소녀가 고개를 숙이자 카퍼가 웃으며 말했다.

“방법이 없긴 왜 없어? 아가씨가 이 밧줄만 풀어주면 돼.”

소녀가 어이가 없다는 눈길로 카퍼를 보았다.

“안 돼요.”

“왜? 생각보다 야박한데. 아까는 도망가라고 경고도 해줘놓고선. 그냥 놓쳤다고 해도 되잖아?”

“안 돼요.”

카퍼는 소녀의 생각을 헤아렸다.

“그렇군. 놓쳐서는 안 돼는 거야. 아가씨 가족 중에도 잡혀간 사람이 있는 건가?”

“언니가 잡혀갔어요.”

“역시.” 

카퍼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말했다.

“그런데, 언니 예뻐?”

소녀는 카퍼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카퍼는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굴렀다. 꽤 구르고 나서, 얼얼한 허벅지를 내색 않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풀어봐. 나 원래 뱀파이어한테 볼일 있던 사람이야.”

“네? 무슨 볼일요?”

카퍼가 목소리를 깔고 진중하게 말했다.

“복수를 해야 해.”

카퍼는 소녀가 어떤 사연이 있느냐 물어온다면 열성적으로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관심이 없었다. 소녀가 관심을 가진 건 카퍼의 진지한 얼굴에 대비되는 꽁꽁 묶인 팔다리의 우스꽝스러움이었다.

소녀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아저씨가?”

“뭐?”

“복수를?”

“아, 응.”

소녀는 풋 하고 웃었다. 카퍼는 뒤늦게 무게를 잡으려 했지만 소녀가 웃기 시작했기 때문에 전혀 느낌이 살지 않았다. 카퍼는 소녀의 웃음이 멈출 때까지 인상을 썼다. 멈추고 나서도 유지했다.

소녀가 사과하며 말했다.

“그런데 뱀파이어에게 어떻게 복수를 할 건데요? 동전 속임수로?”

“나 칼도 잘 써.”

“얼마나 잘 쓰시면?”

묘한 웃음기가 카퍼의 신경을 거슬렸다. 카퍼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기술을 자신 있게 말했다.

“입에 칼 물고 사과 깎는 거 본 적 있어?”

소녀가 다시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카퍼는 다시 뚱한 얼굴이 되어 소녀가 웃음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나 진지한데. 과도랑 사과 가져오면 보여줄게.”

소녀는 그러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과도와 사과를 가져왔다.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밧줄은 소녀의 손가락만큼 굵었으므로, 과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소녀는 카퍼의 입에 칼을 물리고 사과를 접시 위에 두었다. 카퍼는 길게 목을 빼서 사과에 대고 낑낑거렸다. 사각사각 소리가 들렸지만 소녀는 성공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얼마 안 가 카퍼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사과의 윗쪽 부분이 깨끗하게 깎여 있었다.

소녀가 깜짝 놀라며 사과를 들어 올렸다.

“우와, 어떻게 한 거예요? 이건 사과 마법이라도 되나? ……아저씨?”

소녀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과도를 입에 물고 밧줄을 잘라내는 기행을 선보인 카퍼가 이번엔 소녀의 목에 칼을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얼어붙었고 카퍼는 조용히 소녀의 손에서 사과를 빼앗아 소녀의 입에 물렸다. 

카퍼는 소녀와 함께 창고를 빠져나갔다.

밖은 아직 한밤중이었다. 하늘엔 달과 별들이 붙박여 있었다. 인가에서 멀리 떨어질 때까지 걸어 나온 카퍼는 소녀의 입에 물린 사과를 빼냈다.

카퍼가 말했다.

“아가씨에게 실례했군. 미안. 근데 지금 몇 시지?”

“열한 시, 정도일걸요.”

소녀가 눈치를 보며 답하자 카퍼가 말했다.

“겁먹을 필요 없어.”

소녀가 울컥했다.

“누가 겁을 먹었다고 그래요?”

“기왕 이렇게 된 거 뱀파이어가 사는 성으로 데려다줘. 길은 알지?”

“어? 정말 갈 거예요?”

“나 그 뱀파이어한테 볼일 있다니까.”

카퍼는 투덜거렸다. 이에 소녀는 말없이 카퍼를 안내했다. 멀리 성곽이 보였으므로 길만 따라가면 그만이었다. 성에 가까워질 때까지 대화는 없었다. 소녀는 카퍼의 말에 자꾸 웃었던 것이 생각나 얼굴이 달아올랐다.

머쓱해진 소녀가 말했다.

“아까 비웃어서 미안해요. 거짓말인 줄 알았어요.”

“신경 쓰지 마.”

소녀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런데 과도 한 자루 들고 가서 어떻게 할 거예요?”

입에 문 과도로 굵은 밧줄을 자르는 재주는 대단했지만 그게 정말 칼을 잘 쓰는 것인지 어떤지 소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동전을 뒤집는 재주와 별로 달라 보이지도 않았다.

카퍼가 제 손에 쥔 과도를 슬쩍 내려다보며 말했다.

“고수는 장비를 탓하지 않는 법이지.”

“돌아가서 다른 칼 들고 올까요?”

“괜찮다니까. 그리고 지금 가기는 늦었을걸. 마을 사람들이 나랑 너 찾고 있을 테니까.”

“정말 과도만 가지고 이길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마. 나한텐 동전 마법도 있다고. 예를 들어볼까? 앞이 나오면 내가 이기고, 뒤가 내가 나오면 진다고 했을 때,”

카퍼는 걸으며 동전을 튕겼다.

“나는 늘 동전이 앞이 나오게 할 수 있지.”

카퍼가 소녀에게 동전 앞면을 보였다.

소녀가 어이없어 하며 말했다.

“뭘 먹으면 그렇게 자신감이 넘쳐요?”

“아까 그 사과?”

“내가 한참 물고 있었던 거?”

카퍼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녀는 구두 굽으로 카퍼의 발등을 내려찍었다.

그 앞으로 붙박인 별들을 등진 고성이 있었다. 달을 꿰려는 듯 치솟은 첨탑은 을씨년스러웠다.




애꾸눈 드미트리


카퍼는 한사코 말렸지만 소녀는 카퍼를 돕겠다며 성으로 함께 들어갔다.

카퍼가 말했다.

“네가 무슨 도움이 되는데?”

“길을 잘 알죠. 성에 들어가본 적 있거든요.”

“어쩌다가?”

“그건 비밀.”

성으로 들어간 후에 관해서는 카퍼도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군말 않고 소녀를 따라가기로 했다.

소녀는 카퍼를 데리고 성 뒤쪽으로 돌아갔다. 성곽 정문은 단단하게 잠겨 있었지만 하인들이 드나드는 뒷문은 열려 있었다.

안이하다 싶었지만 뱀파이어라면 지금 한창 깨어 있을 시간이다. 굳이 문단속할 필요를 못 느꼈겠지. 카퍼는 그렇게 생각했다.

문을 들어선 뒤, 좁은 복도를 걸어 문 몇 개를 지나치자 붉은 융단이 깔린 넓은 복도가 나왔다. 벽면엔 횃불이 걸려 있어 아주 밝았다. 소녀는 당당하게 복도 가운데로 걸었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카퍼가 말했다.

“이렇게 다니다간 금방 들킬 텐데? 나야 상관없지만.”

“라이칸슬로프들은 밤이 되면 애꾸 말곤 모두 숲 속으로 순찰을 가요. 도망치는 사람 없나 보려고요. 그리고 뱀파이어는 보통 1층까진 안 내려오고.”

“밤에도 안 내려와?”

“뱀파이어는 한밤중에도 해가 뜰까봐 무서워하거든요. 2층 위로는 창문에 죄다 못을 박아둬도, 1층에는 창문이 워낙 많아서 그러지 못했어요. 1층은 괜찮아요.”

“그렇지만 다른 인간 하인들도 있을 거 아냐?”

“몇 명 안 돌아다녀요. 복도 멀리서 오는 게 보이면 가까이 오기 전에 숨으면 될 거예요. 그냥 평범하게 걸어요. 성의 하인처럼 보일 테니까.”

“내가 그렇게 없어 보여?”

소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때 뒷쪽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카퍼가 힐끗 돌아보려 하자 소녀가 급하게 카퍼의 손매를 끌었다. 

“돌아보지 마요. 얼굴 보면 들킬 거예요.”

몇 발자국 앞에 윗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 코 앞까지 두 사람이 걸어갔을 때, 나선형 계단 윗쪽에서 일렁거리는 등불 빛이 보였다. 위에서 누군가 내려오고 있었다.

카퍼가 말했다.

“둘 사이에 꼈을 때 대책은?”

소녀는 일단 카퍼의 손을 이끌고 계단을 두 칸 올랐다.

소녀가 말했다.

“제가 해결할게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여기 조용히 있어요.”

카퍼가 무어라 말하려는데 소녀가 후다닥 계단을 올라갔다. 등불 빛에 그림자가 일렁였다.

마을 사람이니 설득해보려는 건가? 하지만 저 아가씨는 성에서 일하는 건 아닌 거 같던데? 들키는 거 아냐? 카퍼는 복도 쪽에서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숨을 죽였다. 그때 소녀가 계단에서 내려왔다. 

“빨리 와요.”

카퍼는 서둘러 올라갔다.

계단 위쪽엔 다시 넓은 복도가 있었다. 저 멀리 누군가 모퉁이를 꺾어 걸어 사라졌다. 바로 옆엔 등불이 놓여 있었다.

“불이 없다니까 이걸 주더라고요.”

카퍼는 등불을 주워 들며 말했다.

“뱀파이어는 몇 층에 있지?”

“4층, 첨탑 꼭대기에요.”

그렇군, 하고 카퍼가 대답하려는데 주위가 더 밝아져 소녀와 카퍼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났다. 방금 올라온 계단 쪽에서 누가 말했다. 

“백작님에겐 무슨 볼일인가?”

카퍼는 돌아서며 등불을 던졌다. 뒤에 서 있던 남자는 가볍게 등불을 피했다. 눈이 한 쪽밖에 없었다.

“애꾸눈 드미트리.”

“카퍼? 양손잡이 카퍼인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밤엔 우리가 순찰을 돌고 있고, 낮은 인간들에게 지키라고 했는데. 느낌이 안 좋아서 나와봤더니만.”

카퍼는 소녀를 뒤로 밀쳐냈다. 

“떨어져 있어.”

그러곤 과도를 역수로 잡고 자세를 낮췄다.

드미트리는 그 앞에서 장검을 뽑으며 여유를 부렸다.

“여기까지 온 건 대단하지만, 그건 과도잖나. 내 소매나 벨 수 있을지 모르겠군.”

“내 칼과 맞대어본 네가 할 말은 아닐 텐데.”

“그땐 너무 방심했었지. 그리고 그때 자네는 검을 두 자루나 들었다고.”

카퍼가 웃었다.

“그래서 겁이 났나?”

“뭐?”

“그래서 여기, 동쪽 끝까지 도망쳐 온 거냐고.”

“웃기지 말게. 난 백작님을 따를 뿐이야.”

“그럼 겁이 났던 건 백작이었나보군.”

드미트리는 으르렁 거리며 복도로 걸어 나왔다. 소녀가 보기에 카퍼에게 유리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좁은 복도라면 짧은 과도를 든 카퍼에게 어느 정도 유리하게 작용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넓은 복도는 드미트리가 긴 칼을 휘두르기에도 부족하지 않았다.

먼저 달려든 것은 드미트리였다. 큰 동작임에도 허점이 보이지 않는 빠르기였다. 카퍼는 스텝을 뒤로 밟으며 피했고, 드미트리가 칼을 회수하는 동작에서 과도를 찔러 들어갔다. 그건 피할 수 없었다. 드미트리는 완성되지 않은 동작으로 과도를 쳐냈다. 거센 찌르기로 역공했으나 카퍼가 다시 피했고, 빈손으로 드미트리의 손목을 당겨 무게중심을 흐트러트렸다. 카퍼는 드미트리의 어깨를 얇게 베면서 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거리를 벌린 카퍼가 말했다.

“뭐하나, 애꾸눈? 자넨 검으로 날 못 이겨. 그 눈을 잃었을 때도 그랬지. 그건 자신감이 아니라 자만심이야. 좀 더 어울리게 싸우라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드미트리가 얼굴을 구기며 으르렁거렸다. 구겨지는 얼굴에서 입이 비죽 튀어나오고 몸집이 두 배로 불었다. 온몸을 검정 털이 덮었다. 라이칸슬로프 드미트리는 칼을 바닥에 버린 뒤 긴 발톱을 앞세우며 달려들었다.

카퍼는 드미트리의 번갈아 날아오는 발톱을 막고 피했지만 한발 한발 물러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카퍼의 등이 벽에 닿기도 전에 조급해진 드미트리가 양 앞발을 동시에 내뻗었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카퍼는 옆으로 구르며 드미트리가 버린 장검을 주워 들었다.

카퍼가 말했다.

“이제야 양손잡이의 이명이 살아나는군.”

“하나는 사과 깎는 칼이지만 말이야.”

드미트리가 걸걸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카퍼는 아까와 달리 공격적인 공세를 펼쳤고, 몸이 부풀며 타격면이 늘어난 드미트리의 몸에 잔 상처가 늘었다. 하지만 유리해 보이는 것도 잠깐이었다. 드미트리의 상처는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어갔다.

드미트리가 말했다.

“그리고 은도금도 되지 않았지.”

드미트리는 카퍼의 내질러 오는 장검의 날을 잡은 뒤 힘으로 빼앗았다. 드미트리는 손아귀에서 흐르는 피를 무시하며 카퍼의 과도가 들린 팔을 붙잡은 뒤 카퍼의 배에 주먹을 날렸다. 세 번째 공격에 카퍼의 기침에 피가 섞였고, 다섯 번째 공격에서 드미트리는 공격을 멈췄다. 드미트리가 돌아보자, 드미트리의 옆구리에 장검을 꽂아넣은 소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너, 이년…….”

드미트리가 돌아보자 소녀가 칼을 놓으며 몇 발자국 물러났다. 깊게 박히지 않았던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드미트리는 그대로 소녀에게 다가가려다, 소녀는 인사불성이 된 카퍼를 완전히 처리한 후에 잡아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감정에 휘말리면 안 된다. 그는 과거에도 비슷한 상황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드미트리가 카퍼를 다시 돌아봤을 때, 카퍼의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던 손에 과도가 옮겨져 있었고, 과도는 드미트리의 목 깊숙이 꽂혀 있었다.

카퍼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짐승답게 싸워도 마찬가지지만 말이지.”

드미트리는 ‘어떻게 한 것이냐?’ 물으려 했지만 피거품만 부글거렸다. 카퍼는 목을 부여잡는 드미트리를 걷어찬 뒤 장검을 다시 주워 들었다. 드미트리는 단검을 뽑기 전에 목이 잘렸다.

소녀가 다가갔다.

“괜찮아요?”

“멀쩡하지.”

카퍼는 피를 뒤집어쓴 채 피를 쿨럭거리며 토했다. 소녀는 손수건을 꺼내 남자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소녀가 말했다.

“그런데 아까 어떻게 한 거예요?”

“뭐가?”

“왼손은 빈손이었잖아요. 과도를 잡은 오른손은 애꾸한테 잡혀 있었고. 그런데 어떻게 오른손에 있던 과도가 왼손으로 간 거죠?”

남자는 소녀 앞에서 오른손에 있던 과도를 왼손으로, 다시 오른손으로 옮겼다.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았지만, 반쯤 닦아낸 남자의 얼굴도 서로 좌우가 뒤바뀌었다.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동전 마법이지. 좌우를 뒤집는 원리다.”

“진짜 그런 것도 마법이에요?”

“그런 거라니. 누구한테 배운 건데.”

둘은 뱀파이어가 있을 위층으로 향했다.




슈라프넬 백작


여댓 개의 촛불이 불을 밝히는 어두운 서재에서 백작은 책을 읽고 있었다. 피부는 핏줄이 도드라질 만큼 창백했고 눈동자는 붉은색이었다. 선이 날카로운 얼굴은 무표정했다. 눈은 책에 향해 있었지만 오랜 시간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지 않았다.

노크 소리에 백작은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소녀였다.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소녀는 치맛자락을 잡고 인사했다.

책에서 눈을 뗀 백작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루나? 니어?”

“니어에요. 이제 동생은 오지 않으니까.”

“그렇지.”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친애하는 니어 양. 무슨 일이지?”

“드미트리 씨가 쓰러져 있었어요.”

“드미트리가?”

“방금 복도를 지나다 발견했어요. 의식이 없기에 마을에 의사를 부르고 다른 하인들에게는 성안을 수색하라고 일러두고 올라오는 길이에요.”

백작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의심 가는 자가 있나?”

“오후에 마을에서 칼잡이 하나를 붙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이야긴 나도 알고 있다네.”

“탈출한 것 같다더군요.”

“드미트리의 친구들도 불러들였나?”

“아마 오고 있을 거예요.”

“확인해봐야겠군. 드미트리는 어디에 있나?”

“2층 복도에요. 피를 많이 흘렸어요.”

백작은 이내 쥐고 있던 책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거치대에 올려져 있던 세검을 허리에 차면서 말했다.

“니어 양, 의식을 치르며 했던 말 기억나나?”

“어떤 말씀 말인지?”

“내 라이벌에 대한 것 말일세. 나에겐 성가신 적이 있고, 그 적 때문에 이 마을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었어. 그의 검술에 대해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자네 생각은 어때?”

“아, 네. 이 성에 침입하고 드미트리를 죽인 인간은 주인님이 말씀하셨던 그자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니, 난 그런 말을 한 적 없다네.”

백작은 소녀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네? 방금…….”

“거짓말일세.”

“아, 그렇군요. 제가 경황이 없어 착각을 했었나봐요.”

“그래? 이상하군. 그보다…… 드미트리의 친구들을 불렀다고 했지 않았나. 하지만 뿔피리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 라이칸슬로프들을 불러들이는 신호는 뿔피리였을 텐데.”

“그건 침입자가 아직 성 안에 있을까봐 제가 따로 사람을 시켜 불러오라 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이상한 게 있지.”

“어떤 것요?”

“니어 양은 나랑 계속 서재 안에 있었거든. 안 그런가, 니어 양?”

백작이 서재 어두운 구석을 향해 말하자, 또 다른 소녀, 니어가 빛가로 걸어 나왔다. 음울한 자색 드레스에 어울리는 어두운 표정이었다. 방금 전까지 니어 행세를 하던 소녀, 루나는 말을 잃었다. 둘은 쌍둥이였다.

백작이 문 너머를 향해 말했다.

“이제 자네도 들어오게, 양손잡이 카퍼.”

닫힌 문은 침묵했다. 백작이 눈을 부릅뜨자 문짝이 복도로 와직 소리와 함께 뜯겨져 나갔다. 카퍼는 한숨을 쉬며 문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카퍼가 루나에게 말했다.

“젠장. 그러니까 내가 이 작전 안 통한다고 그랬지?”

“달랑 칼 두 자루로 덤비겠다는데 걱정이 안 되겠어요?”

3층쯤에서 루나가 제안한 작전이었다. 언니의 옷을 입고 백작을 복도로 유인해내면, 카퍼가 기습을 한다는 계획이었다.

앞에 서 있던 백작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여전하군, 카퍼.”

카퍼는 백작을 노려봤다.

“너도 여전히 비열하군, 슈라프넬 백작. 마을 사람들에게 인간 사냥을 시키는 것도 모자라서, 쬐끄만 꼬맹이에게 피의 의식을 치러? 네가 말하던 신사도는 어떻게 된 건가?”

“피의 의식이 아니라 종의 의식일세. 반쪽짜리지.”

“자네의 종족이 된다는 건 같지.”

“아닐세. 나와 달리 니어 양은 햇볕 아래서도 돌아다닐 수 있고, 은에 닿아도 살이 타지 않지. 피를 마시지 않아도 된다네. 단지 내 말에 거역할 수 없을 뿐이야.”

“그게 그거 아냐? 네가 과거에 서번트(servant)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렸었는지를 생각하면 더 나쁘다고 해도 좋아. 어쩔 건가? 그때처럼 허울 좋은 껍데기는 벗어 던지고 본색을 드러낼 건가?”

백작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자네가 칼 쓰는 것만큼 도발에도 재능이 있다는 건 알아줘야겠군. 하지만 난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무척이나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게. 무엇보다도, 지금의 나에게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있는지 궁금하군.”

백작이 한쪽 눈을 치켜뜨자 카퍼는 문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우당탕 소리가 들려왔고, 백작은 세검을 뽑으며 두 소녀를 지나쳤다. 

“아가씨들은 이 방에서 기다리고 있지.”

복도로 튕겨져 나간 카퍼는 잽싸게 몸을 일으킨 뒤, 복도에 켜져 있던 횃불을 내리쳤다. 문을 나선 백작은 컴컴한 복도를 맞이하게 되었다.

백작이 말했다.

“어둠 속에선 내 안력이 무용지물이긴 해도, 뱀파이어는 시각보다는 청각에 의존한다네. 이 상황이 인간인 자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거라곤…….”

백작은 말을 마치기 전에 카퍼의 일검을 피해야 했다.

“혀가 길어졌군, 백작. 내 다른 별명을 잊었나.”

“맹인검盲人劍 카퍼…….”

백작은 혀를 차곤 세검으로 반격했다.

카퍼는 백작의 찌르기 버릇을 알고 있었고, 과도로 쉽게 받아넘겼다. 동시에 장검을 찔렀다. 백작은 초인적인 근력으로 내지른 검을 당겨 장검을 쳐냈다. 반격을 당할 수도 있지만 과도의 길이로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카퍼는 뒤집기 마법으로 자신의 좌우를 바꾸었고 과도를 들고 있던 손엔 장검이 잡혔다. 백작은 팔목에 상처를 허용했다.

백작이 말했다.

“어떻게 한 거지?”

“마법이다.”

“이런 마법은…… 없어.”

“당연하지. 라피스 라줄리의 것이니까.”

“허풍도 여전하군.”

어둠 속에서의 싸움은 계속되었고, 카퍼는 유리해져도 빛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상처가 늘어나는 것은 백작뿐이었다. 상황이 나빠졌음을 깨달은 백작은 좀 더 물러나 서재의 문가로 뒷걸음질 쳤다. 빛으로 드러난 그의 모습은 피 칠갑을 해, 형편없었다.

“겁쟁이가 되었군. 카퍼.”

어둠 속에서 카퍼가 말했다.

“보통은 신중해졌다고 하지.”

“앞으로도 그렇게 여유로울 거란 생각은 말게.”

그리고 백작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고대의 말을 중얼거렸다. 놀란 카퍼가 과도를 내던졌지만 백작은 가슴에 칼이 박힌 채 계속 입을 움직였다. 백작의 세검에서 가볍게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복도는 습한 여름이었고, 칼끝은 음전하로 떨리는 구름, 복도 끝은 양전하를 품은 대지였다.

카퍼는 직감이 아니라 정전기에 의해 털이 곤두서는 선명한 위협을 느꼈다. 앞으로 달려가 백작의 주문을 방해하기에도, 뒤로 달려가 도망치기에도 너무 늦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카퍼는 창문을 막아놓은 판자를 깨부수며 허공으로 뛰어들었다. 그 뒤로 쾅 하는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결투


별들이 카퍼를 맞이했다. 하지만 낙하감은 생각보다 짧았고, 카퍼는 지면에 닿기 전에 몸을 구르며 충격을 완화했다. 카퍼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떨어진 곳은 3층의 테라스였다. 모든 창문이 판자로 막혀 있는 가운데 유일하게 부서진 창문으로 백작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퍼는 칼끝을 백작에게 향했다.

“비겁한 수를 쓰는군.”

“얄팍한 속임수를 먼저 쓴 건 자네일세.”

“눈깔에 먼저 힘준 게 누군데.”

“……그런 저열한 도발에는 넘어가지 않아.”

백작은 가슴에 박힌 과도를 바닥에 버린 뒤, 품에서 작은 뿔피리를 꺼냈다. 뿔피리를 불자 둔중한 소리가 낮게 깔리며 멀리까지 퍼졌다. 멀리서부터 그에 화답하는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카퍼가 비웃었다.

“왜? 질 거 같나?”

“자네라는 진흙탕에서 한시라도 더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뿐이야.”

백작은 가볍게 테라스로 뛰어내렸다. 카퍼가 긴장하며 자세를 잡자, 백작은 여유 있게 옷을 털고 옷깃을 세우며 말했다.

“이길 수 있겠나? 카퍼. 이제 자네의 속임수는 모두 들통 났고, 칼도 한 자루뿐이야. 그것도 은도금이 되지 않은 평범한 철검이지. 이제 잠시 후면 라이칸슬로프들이 몰려올 테고, 밤은 아직도 한참이나…… 칫!”

백작이 산만해진 틈에 카퍼는 밀어걸어 왔고, 그 거리는 아주 가까웠다. 카퍼는 그대로 백작의 목을 노려 찔렀다. 비록 그림자 세계의 괴물들이 은이 아닌 쇠붙이에 당한 상처를 빠르게 재생하더라도, 목이 잘린다면 소용없는 일이었다.

백작은 왼팔을 내주면서 칼의 찌르기를 늦추고, 오른손의 세검으로 반격했다. 카퍼는 과감하게 칼을 놓으면서 몸을 틀었고, 재빨리 검을 회수하며 백작의 배를 걷어찼다.

백작은 뒤로 다섯 걸음을 물러나다가 고개를 들며 눈을 부릅떴다. 보이지 않는 힘이 허공을 때리며 카퍼를 튕겨냈다. 아니, 그건 백작의 착각이었다. 백작이 방금 날려보낸 건 카퍼의 망토였다. 카퍼의 칼날이 백작의 옆구리를 베어냈다.

하지만 뱀파이어의 몸은 질겼다. 드미트리와 검을 나누며 무뎌진 칼날은 깊은 상처를 남기기에 부족했고, 뱀파이어는 여력을 모아 다시 카퍼를 노려보았다. 카퍼는 붕 날아간 뒤 바닥을 구르다 테라스의 돌난간에 부딪혔다.

백작은 이미 피가 멎은 왼팔로 옆구리를 쓸어내렸다. 검붉은 피가 진득하게 묻어나왔다.

“제법이야.”

백작은 천천히 카퍼에게 걸어갔다. 카퍼는 의식을 잃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칭찬일세. 이제 자네가 그림자 공작과 몽마夢魔들을 처리했다는 소문이 진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백작이 앞에 다가왔음에도 카퍼는 의식을 찾지 못했다. 백작은 잠깐 인상을 썼다가 말했다.

“작별인사는 했다고 치지.”

백작은 세검으로 카퍼의 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카퍼가 조금 더 빨랐다. 칼날은 미처 닿기 전에 튕겨졌다. 하지만 백작의 움직임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두 번은 속지 않는다!”

이미 준비된 동작으로 백작의 안력이 쏘아졌다. 하지만 카퍼는 재빨리 오른손으로 백작의 눈을 덮었다. 퍽 소리와 함께 손가락이 꺾여 나갔다.

카퍼는 이를 악물고 백작에게 공세를 가했다. 카퍼의 피로 붉어진 시야 탓에 백작은 막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백작은 뱀파이어였다. 이내 귀를 열고 공격을 받아내며 눈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흥분한 마음을 추스르고 시야가 회복되길 기다렸다. 백작은 이것이 카퍼의 마지막 발악임을 알고 있었다.

다음 칼날이 왼쪽에서 날아들고 있었다. 시력이 회복되었다고 판단한 백작이 왼쪽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오른쪽에서 날아든 칼날이 백작의 세검을 거세게 쳐내 날려 보냈다. 허공을 두어 바퀴 돌던 세검은 테라스 밖으로 떨어졌다.

카퍼가 말했다.

"고개를 돌리지 마라. 백작.”

카퍼의 칼은 백작의 목에 가닿아 있었다.

백작이 말했다.

“어떻게 한 거지?”

“말했잖나. 좌우를 뒤집는 마법이라고. 속임수가 아냐. 나만 뒤집을 수 있는 거도 아니고. 동전처럼 뒤집은 거다. 네놈의 좌우를 뒤집은 거지.”

백작은 화를 참는 듯,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카퍼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나?”

“창문을 봐라.”

카퍼는 천천히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자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 니어가 창틀에 서 있었다.




동전 마법


“언니! 왜 그래!”

그 옆에서 루나가 니어에게 다가가자, 니어는 한 발을 허공으로 내밀었다. 울상의 니어가 말했다.

“루나! 몸이 말을 안 들어!”

카퍼가 입술을 깨물었다.

“서번트의 의식 때문인가.”

“어떻게 할 건가? 자네는 내 목을 칠 수도 있어. 하지만 뱀파이어의 질긴 목숨을 생각하게. 나는 머리가 바닥을 구르는 순간에도 저 아이를 난간에 뛰어내리게 할 수 있어.”

“뭘 원하지?”

“칼 좀 치우게.”

카퍼는 아주 느리게 칼을 움직였다. 그러면서 창문을 바라보았다. 루나는 밖의 상황을 살피다 카퍼와 눈이 마주쳤고, 순간 니어의 옷깃을 잡아 창틀 안쪽으로 넘어트렸다. 카퍼가 칼을 다시 목 가까이 댔다.

“하, 이런 야비한 수에는 한계가 있지.”

“적어도 지금은 아닌 거 같군.”

잠깐의 소란이 일더니 루나를 끌어안은 니어가 나타났다. 니어는 루나의 목에 단도를 가져다대고 있었다. 

“젠장.”

“그럼 이제 칼을 치우게.”

“아저씨! 전 괜찮아요! 그 괴물을 죽여요!”

카퍼는 그 말을 무시하며 물러났다.

백작이 말했다.

“때마침 친구들도 온 것 같군.”

카퍼가 둘러보자 하나 둘 라이칸슬로프들이 성벽을 타고 올라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는 모두 여섯이었다. 라이칸슬로프들은 테라스를 넘어와 카퍼를 둘러쌌다. 

카퍼가 말했다.

“이제야 끝이 왔군.”

“부질없는 저항은 관두게.”

카퍼는 백작의 말에 칼을 바닥에 꽂고 지친 듯 기대었다. 몸 곳곳이 쑤시고 아팠다. 피에 딱딱하게 굳지 않은 옷자락이 없었다. 카퍼는 뻣뻣한 팔을 움직여 품을 뒤졌다.

라이칸슬로프에게서 칼을 건네받은 백작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나?”

카퍼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주머니를 뒤졌다. 오랜 침묵이 이어지자 백작은 카퍼가 또 무언가의 수를 숨겼을까 긴장했지만 카퍼가 꺼내 든 것은 흔한 구리 동전이었다.

카퍼는 동전을 튕겨서 왼쪽 손등에 떨어지는 순간 오른손을 덮어 가렸다.

“백작. 앞일까, 뒤일까.”

“그게 유언인가? 그런 시답잖은 농담이?”

“왜? 내가 속임수를 썼을 거라 생각하나?”

“……그래. 그 속임수 마법을 쓰겠지. 내가 앞이라고 하면 뒤를 보여줄 테고, 뒤라고 하면 앞인 동전을 보여주겠지.”

“그래서 대답은 안 할 건가?”

“마지막 소원이라면 대답해주겠네. 뒤일세.”

카퍼는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치웠고 손등 위의 동전은 앞을 보이고 있었다. 카퍼는 동전을 들어 백작과 라이칸슬로프들에게 천천히 들어 보여주다가, 끝으로 루나와 니어에게도 들어 보여주었다.

“꼬마 아가씨! 앞이야! 또 내가 이겼다고!”

“됐어. 그쯤하지.”

백작은 카퍼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카퍼는 힘에 부친 듯 몸을 숙였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왔다.

머나먼 곳으로부터 오는 바람이었다. 그 바람은 조금씩 거세져, 백작이 의심스럽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그의 발걸음이 바람에 의해 늦춰지고 있었다.

“카퍼! 이건 또 무슨 술수지?”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바람결에 묻혀 카퍼에게 잘 들리지 않았다. 카퍼는 단지 눈을 들어 하늘의 별들을 보았다. 별들은 일제히 서쪽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언제나 있는 별의 운행이었다. 하지만 그 속도는 눈에 띄게 빨라지더니, 이내 물이 흐르는 것처럼 흘러가 성 너머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노도와 같은 바람에 라이칸슬로프들은 바닥에 발톱을 박아 넣었고, 창문에 덧댄 판자들은 부들부들 떨며 떨어져나갔다.

“설마!”

백작은 이를 악 물고 눈을 뜨고자 했지만 거센 바람에 고개를 드는 것조차 힘들었다. 저 지평의 끝에서부터 다가오는 구름들이 별보다 빠르게 시야 밖으로 벗어났다.

세계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동전의 세계였다. 빛과 그림자의 양면을 가진 세계였다. 세계의 기울기는 자꾸만 심해져 별과 구름을 흘리다 못해 빛까지 끌어오고 있었다. 동쪽 끝에서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백작과 라이칸슬로프들이 튕겨지듯 성벽에 처박혔다. 카퍼는 떠오르는 태양을 등진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지평선은 붉게 타오르다 빛을 머금고 주황색으로 옅어졌고, 마침내 백색에 다다라 하늘을 푸름으로 덮었다. 태양으로부터 쏟아지는 눈부신 광선이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잡아먹으며 성벽의 낮은 곳부터 기어 올라갔다. 초대받지 못한 그림자 세계의 손님들은 불타오르고, 태양이 하늘의 가운데 도달했다. 바람이 멈추고 땅 위의 모든 존재들이 스스로의 색채로 선명했다.

그것은 찬란한 정오이되, 완벽한 동전 마법이었다.





위래

온라인 이곳저곳의 장르 커뮤니티와 작은 대회들을 전전하면서 장르소설을 써왔다.

2010년 8월 네이버 오늘의 문학에 판타지 소설 「미궁에는 괴물이」를 게재한 바 있으며,

창작집단 몽니의 큐빅노트 공모전에서 판타지 소설인 「동전 마법」으로 수상하였다.

글쓰기에 있어 장르적 장벽을 허무는 데 관심을 두고 있으며, 본격 장르소설을 지향하고 있다.

  1. 용아람 2015.07.07 04:27 신고

    예전에 님이 미완으로 사이트에 올렸던 동전마법이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멋진 글로 완성시켜 뒀었네요. 담백한 문장과 결말의 묘사에 완전히 빠져들어서 봤습니다. 간만에 판타지 단편 하나 제대로 본 느낌이네요. 잘 봤습니다.

  2. 현골 2015.07.09 09:51 신고

    크... 좋네요. 오랜만에 보는 판타지소설

  3. 지나가는이 2017.03.13 19:55 신고

    재미있네요. 잘읽었어요

  4. 루트(根) 2017.03.14 23:19 신고

    어!? 미궁에는 괴물이를 쓰신 분이시군요!?
    워낙 재밌게 읽었던지라 추천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네요ㅠㅠb
    좋은 작품 감사합니다~!*^^*

    동전 마법사씨 굉장해!+ㅁ+b

+ Recent post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