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조의 전설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했지만, 본래 이번 차례에는 대안 출판으로써의 킥스타터 펀드에 대해 말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그새 좀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바로 사실상의 전업 1인 출판사인 불새 출판사의 등장이다. 이 이야기를 하고 나서 기존 주제를 다시 다루는 쪽이 좋을 듯해서 예고드렸던 주제는 한 차례 뒤로 미루었다. 양해 부탁드린다.

자. 보라. 21세기의 여명 앞에 장렬히 산화한 그리폰(북스)의 잿속에서 불사조는 다시 태어났다. 이름하여 불새 출판사다. 주로 20세기 중후반의 SF 작품들을 낼 계획이라고 하며, 1차분 세 권은 이미 출간되었다. 이 출판사의 실무는 한 명이 담당한다. 표지 디자인, 번역, 계약, 본문 편집과 교정교열, 인쇄 감리 등의 제작 업무와 재고 관리 및 서점 마케팅까지 한 명이 전부 한다. 사실상 출판에 관련된 모든 업무다. 그간 출판계에 발도 담근 적 없었던 사람이 갑자기 이런 일을 벌였다. 그 이유는 순진하다(나쁜 뜻은 아니다). 불새 출판사는 “보고 싶은 SF가 안 나와서 내가 차린 출판사”다. 풋풋한 열정이랄까, 실제로 이 출판사에서 만든 책을 보면 예전에 팬들끼리 번역해서 제본해 보던 책 생각이 난다. SF 팬들은 이 순진한 만듦새를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좀 아이러니한 표현이지만, 열렬한 아마추어리즘이라고 할까. ‘정말로 이런 짓을 저지른 인간이 있었어!’라는, 감탄 비슷한, 팬으로서의 연대의식을 느낄 만하다. 어쩌면 당신은 불새 출판사의 카페에 올라온 출사표를 보고 박수를 쳤을 수도 있다.

거기까지다. 불새 출판사의 책들은 현재 상태로는 절대로 현재의 SF 팬덤 바깥으로 확장하지 못한다. 출판사 담당자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확장 불가능한 최소한의 팬덤’의 수요를 감안하고 제작이 이루어졌음은 출판사의 카페에 올라온 글에서도 이미 짐작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출판사가 다음 책을 출간할 수 있을 정도의 이득이 남으려면 많이 팔거나 제작 비용을 줄여야 한다. 그러나 SF 팬임을 밝힌 불새 출판사 담당자는 SF의 판매량이라는 변수의 상한선을 냉정하리만치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지속 방안’은 제작 비용의 절감에 집중된다. 그리고 그 줄어든 비용의 대부분은 인건비다. ‘내가’ 좋아하니까 ‘내가’ 돈 덜 받을 각오를 한다.

앞으로 꾸준히 출간이 계속된다치고, 발간하는 모든 책이 평타 이상의 성적을 기록하지 못했을 경우에 이 출판사가 리스크를 연착륙시킬 수 있는 방법은 담당자의 인건비를 더 낮추는 것뿐이다. 리스크를 버텨줄 축적 자본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담당자는 리스크를 극복하기 위한 고통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SF에 대한 애정을 통해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 

감동적인 이야기지만 나쁜 징후다. 사업의 문제를 애정으로 극복해 나간다는 말은 그 일 또는 업종이 이미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뜻이다. SF라는 업종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선택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앞서 이 코너에 연재했던 글(on우주 7월호에 수록)에서도 SF 출판사의 독자 펀드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애정을 담보 삼은 대출 말이다. 시장으로써의 존속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을 누군가의 열정과 소수의 맹목적인 애정으로 메꾸는 데는 한계가 있다.

물론 이런 위기론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은 많은 팬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수도권 아파트 가격 붕괴의 위기론이 점점 목소리를 높이는 와중에도 집값은 엇비슷한 것처럼, SF 역시 안 된다 안 된다 하면서 어떻게든 살아남고 있다. 팬들이 체감하는 위기론은 좌절한 SF 시리즈들과 문 닫은 SF 전문 임프린트들을 마음에 묻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정적인 심리적 피드백에 불과할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사용할 수 있는 패가 남아 있었고 지금은 그 패를 소모하는 중이다. 바로 대형 출판사와의 협업, 즉 임프린트다. 웅진의 오멜라스나 현대문학의 폴라북스처럼 말이다.

그럼 풍부한 자본과 출중한 마케팅 역량을 갖춘 대형 출판사의 임프린트는 군소 SF 출판사의 상황과 다른가? 미스터리나 스릴러 쪽을 제외하고 SF로 한정짓는다면 상황은 역시 좋지 못하다. 열린책들이 소위 ‘경계 소설’을 표방하며 내던 작품들도 그 숫자가 점점 줄어가고 있고, 오멜라스도 끝났고, PKD 선집을 출간하며 신성의 자리를 차지한 폴라북스의 출간 속도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한때 J. G. 발라드의 SF를 중심으로 몇몇 책들을 낸 문학수첩도 마찬가지다. 대형 출판사의 임프린트는 출판사들이 자발적으로 장기적인 기획을 하고 움직였다기보다는 SF에 관심이 있는 기획자 또는 편집자들이 프로젝트를 따낸 경우에 가깝다. 일종의 계약직인 셈이다. 따라서 대형 출판사의 SF 임프린트는 사실상 첫 프로젝트에서 이미 사활이 갈린다. 그리고 지금까지 ‘활’의 길을 걸은 임프린트는, 글쎄, 사실상 없다고 보는 게 좋겠다. SF 시장은 대형 출판사가 원하는 수준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최근 몇 년 동안 여기저기서 대형 출판사의 SF 임프린트가 생겨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하나는 수많은 출판사들을 돌아다니며 기획을 따내고 어떻게든 새로 깃발을 꽂았던 열성적인 SF 종사자들이다. 그런데 더 치명적인 이유가 있다. 그 대형 출판사들이 그제껏 본격적으로 SF를 해본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임프린트를 닫았거나 점점 닫아가는 출판사들은 이제 SF 시장이란 게 뭔지 경험했고, 무슨 큰 변수가 있지 않은 이상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손에 쥔 패는 줄어들고 있다.

만약 대형 또는 중견 출판사와의 협업 루트가 줄어든다면 남은 방법은 자생뿐이다. 그 자생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는 앞서 간략히 서술했다. 어쩌면 불새 출판사는 한국 SF 시장의 재미난 에피소드가 아니라 도래할 격랑의 전주곡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출판사의 이름이 참 절묘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태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새가 방금 우리의 어깨 위로 날아와 앉았으니, 어쩌면 곧 큰 바람이 불 것이다.





최원호

어린 시절 금성출판사의 SF로 본격적인 독서를 시작했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MD로 들어가서 유아 그림책부터 각종 수험서까지 다양한 분야의 책을 팔아왔다.

현재는 소설과 예술 분야를 담당하고 있다. on우주 홀수호에서 칼럼 “소매가로 책을 팝니다”를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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