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정서위제하작             - 김보영 편




0. 들어가며

 부동산 대란이라는 소란이 서울이라는 조막만한 땅덩어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지라. 글쟁이들 지면이라는 공간도 해가 지날수록 좁아지고 구하기 어려워지고만 있어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이곳, 온우주 소식지라는 지면을 분양받게 되었을 때 기쁘기도 했지만도 이 귀하고도 귀한 지면에서 무슨 사업을 벌여야 이문이 남을지가 또 고민이 되었다.


  원래 나야 블로그라는 공간에서 놀던 가락이 있으니 하던 대로 영화평을 쓰거나 작품에 흔히 등장하는 상징이나 이미지에 대한 기호학적인 분석을 하거나 할까 이것저것 안을 짜보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귀한 지면을 얻은 만큼, 카페베네나 롯데리아처럼 흔한 장삿속으로는 영 재미가 없겠고. 기왕 온우주 소식지라는 부동산에 자리를 잡은바 더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들자고. 더 융성한 지역 문화를 창출해보자고 쓸데없이 포부를 넓게 잡기로 했다.


  그래서 준비한 기획이 바로 이 당정서위제하작이다. 어렵게 써놓긴 했지만 뭐 별 의미는 없다. 그저 당신이 정상에 서기 위해서 제거해야 하는 작가들의 약자일 뿐이다.


  한국에는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많고 좋은 글을 읽는 사람은 그보다 더 많다. 그러니 좋은 글에 대한 글을 써보면 나름 수지타산이 맞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좋은 글에 대한 글은 좋은 글의 수에 비하면 많지 않은 편이고 뭣보다 좋은 글에 대한 글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글의 형식에 대해서도 이모저모 고민을 해보았다. 작가 개인에 대한 열전을 쓰기에는 아직 자료가 많지 않고, 작품 하나에 대한 비평을 쓰기에는 써야 할 글이 너무 많다. 그리하여 내린 결론은 내가 정상에 서기 위해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작가들의 리스트를 만드는 동시에, 이 작가들의 작품군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과 매력을 정리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리스트의 첫 시작은. 당신이 정상에 서기 위해 제거해야 하는 첫 작가는 바로 김보영이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달리 또 누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1. 거울

  김보영은 거울의 작가다. 독자로 하여금 어떤 신비롭고 환상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 정확히는 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글자를 읽고 있는 당신 스스로의 모습을 마주 보게 만드는 작가다. 김보영의 소설은 그렇게 책을 펼친 순간 비현실의 공간으로 빠져들기를 기대했던 독자들을 무참히 혹은 태연스레 배신한다.



  김보영이 SF작가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소설에는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진 행성이나 현재 이 시간과는 분명 다른 시대의 배경이 주어질 때가 많다.

  하지만 독자들은 소설에 등장하는 시공간이 지금 이곳의 우리가 사는 세계가 아님에도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이제까지 자신이 읽은 이야기가 모두 거울처럼 나 자신을 반사하고 비추기 위해서 마련된 공감이었음을 깨닫는 일종의 발견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발견의 순간 독자들은 작가의 무심한 배신을 사랑하게 된다.



  『멀리 가는 이야기』에 수록된 「다섯 번째 감각」은 김보영 특유의 배신이 잘 드러난다. 가난한 주인공 연주는 얼마 전 언니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언니는 그녀와는 달리 여러 면에서 감이 뛰어났으며 항상 야근을 한다며 늦게 귀가한 것 외에는 별다를 것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경찰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언니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있었다며 추궁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여느 스릴러 장르의 도입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김보영은 언제나 이 지점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사이비 종교 집단에 빠져 있었다고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뭘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여...」

  「죽기 전에 언니가 주문이라도 외우더라는 말인가요?」

  「입을 움직였습니다.」

  「입을 움직여요?」

  나는 그만 팔을 크게 움직이고 말았다.

  「누구나 입은 움직이잖아요? 밥을 먹을 때도, 숨을 쉴 때도 입은 움직여요!」

  「특이하고 규칙성 있게 움직입니다. 그들은 입을 사용해서 어떤 특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요.」 

- 김보영, 「다섯 번째 감각」, 『멀리 가는 이야기』, 행복한책읽기, 2010, p.76.



  경찰과 연주와의 대화는 어딘가 어색하다. 인용하지 못한 소설에서의 묘사나 시점에서도 불분명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경찰은 언니가 주문을 외웠기라도 했냐는 연주의 질문에 생뚱맞게도 입을 움직였다고 대답하고 연주는 소리를 크게 외치지 않고 팔을 크게 움직이며 놀란다. 경찰이 묘사하는 사이비 종교집단의 광신적인 행동은 입을 규칙에 맞추어 사용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독자들은 그제야 제목의 의미를. 인물의 대사가 “”이 아닌 「」 안에 들어있는 이유를. 그리고 이제껏 느꼈던 위화감을 짐작하게 된다. 다섯 번째 감각. 말하고 노래하는 것을 듣는 감각. 청각이 배제된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음을 말이다.

  작품의 초반부터 반전이 밝혀지기에 스포일러를 하더라도 독서에 방해가 되지 않을 작품인 「다섯 번째 감각」의 소재만을 설명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류의 반전은 김보영의 소설에 필수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이 반전은 과학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기존의 추리물이나 SF에서 다루어지는 소재와는 궤를 달리한다.

  「다섯 번째 감각」에서 반전으로 다루어진 소재인 청각은 일상적으로 느끼는 오감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그 감각이 존재하지 않는, 혹은 박탈된 세계를 보면서 우리는 이제까지의 일상을 다시 되짚어보게 된다. 이러한 관점의 재배치는 김보영만의 색깔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특별하다.



  현실을 달리 보게 만드는 ‘낯설게 하기’의 기법은 문학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이다. 하지만 김보영은 이 기능을 자신만의 방법론으로 실천한다. 김보영의 반전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거나 미처 보지 못한 것을 알아차리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가능성의 제시가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새로운 육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가능하게 만들어온 전제가 지워진 세상을 통하여 우리가 너무 익숙한 나머지 잊고 있던 오감을 일깨우는 방식의 반전이다.


  그렇기에 김보영의 SF에 나오는 과학개념들은 「진화신화」나 「촉각의 경험」에서와 같이 전문적인 첨단과학기술이 아닌 일반적이고 친숙한 교과목 영역 안에 있음에도, 그 어떤 SF 작품보다도 더 미래적인 체험을 가능케 해준다. 



  김보영을 거울의 작가라고 부르고 싶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엄밀히 말해 거울은 좌우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앞뒤가 바뀌는 것이다. 당신이 거울 앞으로 다가가면 당신의 거울상은 커진다. 당신이 앞으로 간만큼 거울상은 뒤로 와 가까워진 것이다. 당신이 거울 앞에서 물러나면 또 반대로 거울상은 작아진다. 당신이 물러난 만큼 앞으로가 멀어진 것이다. 


  김보영의 소설도 마찬가지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색다른 이야기가 익숙한 모습으로 바뀐다. 일상에서 일그러진 부분을 찾아내는 일반적인 반전과는 달리 앞뒤를 바꾸는 것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고 마주 보게 만든다.

  눈에 불을 밝히고 낯선 무언가를 뒤지는 태도가 아닌 태연스레 시야의 주체를 바꿈으로써 나 자신을 제 3자의 시선으로 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 전혀 익숙하지 않은 시점에서 비춰지는 익숙한 본인의 얼굴은 작가의 깊은 공감능력과 타자에 대한 애정 어린 태도에 힘입어 제법 잘생겨 보인다.



  그러므로 애초에 중요한 것은 반전 자체가 아니다. 스포일러를 기피하는 사람들을 위해 김보영 작품군에 등장하는 반전을 일일이 언급을 하지는 않았으나 반전에 대해서 미리 듣고 읽더라도 경이를 느낄 수밖에 없음은 분명하다.

  로봇과 유기 생명체의 관계가 도치된 「종의 기원」이나 히말라야 등정을 하듯이 지하를 파고 내려가는 「땅 밑에」나 김보영의 반전은 카타르시스의 폭발이 아닌 아드레날린의 폭주를 부추기는 방식으로 글의 호흡을 이끌어나간다. 이미 미리 알고 모르고의 영역을 넘어서 있다. 절름발이가 범인이고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라는 식의, 작품 내내 꽁꽁 숨겨놓은 일회성의 반전이 아닌 - 김상훈이 논리적 성실함(「논리와 고적(孤寂)한 환상의 교점에서」, 『진화신화』, 행복한책읽기, 2010, p.321.)이라 말한 바 있는 - 일관된 태도와, 마주 보는 시선 자체에서 김보영의 반전은 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2. 거울미로


  놀라운 점은 김보영의 실험이 - 혹은 실험이라고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내재화된 저 태도가 여전히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울 자체였던 김보영의 소설은 거울을 작품 안의 인물이자 소재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함으로써 거울 안의 거울, 거울을 품은 거울이 된다.



  아예 제목부터 거울이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거울애」에서는 가상의 증상인 ‘자기대상분리장애’를 겪는 여성 소희가 등장한다. 이 자기대상분리장애는 몹시도 예민한 인물이 타자의 감정과 생각을 읽고 그것을 내면화하는, 자신과 타자를 분리하지 못하는 증상이다. 소희의 주변 인물들은 그녀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매료되어 나르시시즘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녀를 독차지하려 애쓴다.



  「거울애」에서 제시된 거울과 주체의 관계는 「몽중몽」과 「스크립터」에 이르러서 인물과 인물만이 아닌 작품 구조의 문제로 확장된다. 「몽중몽」은 제목 그대로 꿈과 꿈이 연쇄되는 내용이고 「스크립터」는 가상현실온라인게임에 유일하게 남은 플레이어와 이 게임 서비스를 종료하려는 운영자 사이의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스크립터」의 플레이어는 롤플레잉에 광신적일 정도로 천착하는 사람이기에 운영자는 플레이어와 대화를 하기 위해 천사의 형태를 빌리기도 하고 게임 세계관 설정을 배워 스스로 롤플레잉을 하려 하기도 한다. 이 우스꽝스럽고 즐거운 소품으로 보이는 이야기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분명 플레이어로 등록되지 않았으나 인공지능 NPC로도 보이지 않는 제3의 인물이 등장하면서 앞과 뒤를 분간할 수 없는 미스테리극으로 전환된다.

  이 모든 등장인물들 모두 살아있는 인간인지 아닌지 의심받는다.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임을 설득하려 애쓰지만 이에 대한 증명을 이루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거울 두 개를 서로 마주 대었을 때 그 안의 거울상이 무한히 펼쳐지는 것처럼 의심과 의심은 끝없이 이어져 나갈 수밖에 없다. NPC일지 모르는 플레이어와 게임일지 모르는 현실 그리고 신이나 다름없는 운영진은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된다. 


  기존의 작품이 현실을 깨우치는 반전으로써 독자를 비추는 거울이었다면 「스크립터」의 구조는 하나의 진실을 찾기보다는 여러 거짓 속에서 있다고 믿었던 현실을 의심하고 가늠할 수밖에 없는, 모든 벽이 거울로 이루어진 미로인 것이다. 



  이러한 거울미로의 구조는 2013년 출간된 김보영의 첫 장편 『7인의 집행관』에서 정수에 이른다. 이 소설의 주인공 흑영은 그의 형이자 주군인 왕을 시해한 죄로 여섯 개의 세계에서 여섯 번의 사형을 선고받는다. 흑영에게 원한이 있는 6명의 집행관은 각자 그를 죽이고 싶은 방법을 골라 도시문명의 조직폭력배나 옛 제국의 검투사, 신화 속의 존재 등으로 흑영을 다시 태어나게 만들고 다시 죽이려 한다. 

  하지만 세계를 주무를 수 있는 권능에도 불구하고 집행관들은 흑영의 도발과 폭로에 뒤흔들리며 올바른 집행을 수행하지 못하고 만다. 집행관이 만들어낸 세계는 집행관의 욕망이 투사된 세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흑영은 그 욕망을 가지고 놀 듯 집행관을 희롱하고 훼방한다.


  “우리는 모두가 자신이 가장 원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시스템은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우리를 보좌하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 김보영, 『7인의 집행관』, 폴라북스, 2013, p.359.


  이야기가 진행되며 집행관은, 또 흑영은, 왕 시해 사건의 전모에 조금씩 다가가게 된다. 하지만 이 전모는 어디까지나 가상현실 공간에서 일어나는 현실 세계에 대한 어설픈 재현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이자 기억마저 잃어버린 흑영의 입을 통해서만 나온다. 그리고 그 흑영에게 새로운 삶을 만들어주는 집행관들 역시 완전한 평면의 거울이 아닌 왜곡되거나 부서진 거울로서 흑영을 비출 뿐이다.


  “왕비님, 우리 중에 자신의 모습으로 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소암공이 언제부터 저리 왜소하셨으며, 양명왕께서는 왜 아직도 다리를 쓰지 못하십니까? 수경도 몰라볼 정도로 번듯해졌더군요.”

“.......”

“이것은 제 자아상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보는 모습은 실제와 다르고 남이 보는 모습과도 다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더러 다른 모습을 하거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라 하시면 그리 간단히 할 수 없습니다.” 


- 위의 책, p.290.



  김보영이 거울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 순간 책 안에 기술된 모든 문장은 불신의 대상이 된다. 보이는 모든 것이 실존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도 몰랐던 욕망에 미혹되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재주란 없다. 기존의 김보영 작품에서 거울로서의 역할이 본인의 모습을 확인하고 재규정하기 위함이었다면 『7인의 집행관』을 비롯한 작품군은 거울미로로써, 내가 나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의문과 공백만을 남기기 위해 작동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렇게 의심하고 의심한 끝에 남는 이 텅 빈 무엇이야말로 진정한 나 자신임을. 그리고 김보영의 소설이 점점 더 맑고 날카롭게 우리의 얼굴을 비출 수 있도록 닦여지고 있음을 말이다.





  김보영의 작품에는 흔히 해외에 번역되어 출간되더라도 반드시 인정을 받으리라는 평가가 따라붙는다. 이는 역시 앞서 서술한 바처럼 이 작가가 독자적인 구조와 탄탄한 서사라는 기본기 두 가지를 고루 갖춤에서부터 나오는 신뢰 덕분일 것이다. 그렇기에 김보영을 당정서위제하작. 당신이 정상에 서기 위해 제거해야 하는 작가의 첫 번째 리스트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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